어둠의 왼손 (어슐러 K. 르 귄, 1969)


 "생존자의 회고록"이라는 책이 있다. 공상 소설이지만 과학 소설은 아니고, 환타지라고 보기에도 애매한. 그 책의 마지막 문장은 마침표 없이 서술어 없이 중간에서 툭 잘린 채로 끝났다. 소설가라면 시도해보고 싶은 형식상의 파격이었을 것이다.

 나는 그 형식의 파괴에는 별반 불만이 없었다. 네버 엔딩을 '사실적'이라고 생각하는 작가라면 한 번 쯤 해보고 싶지 않을까-라는 짐작도 오래전부터 있었다. 다만 나는 그 책의 세부 묘사의 부족에 눈살을 찌푸렸다. '왜'에 관한 (그것도 구체적인) 답을 주지 않는 소설이란, 대체 왜 그 이야기가 소설의 형식을 띄어야 하는 지에 대한 대답을 결여하게 된다고 생각한다. 그저 흘러가듯 풍경을 묘사하고 싶었다면, 사진이나 영화가 낫지 않은가. 눈에 보이지 않는 생각,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 눈에 보이지 않는 과거와 미래에 대한 이야기 또는 설명을 듣고 싶어서 소설을 읽는 게 아닌가. 마침표 없이 툭 하니 던져진 엔딩이 아니라, 그 원인에 대한 묵묵부답이 독자에 대한 배신이라고 나는 느꼈다.

 이 책도, 그 책과 비슷하다.

 설정은 매우 멋지고, 주인공들은 강인하고, 배경은 황량함과 우아함을 넘나든다. 스토리는 인간적이면서도 상당히 낙관적이어서 꽤 마음에 들었다. 역시나 감질나는 간접적인 묘사는 인간에 대한 예의라고 받아들여도 좋겠다. 틀은 매우 잘 짜인 소설이다. 'SF계에서 노벨 문학상이 나온다면 바로 이 분!'이라는 서평이 아쉽지 않을 만큼의 틀이다. 

 그러나 어째서 주인공들의 마음을 그토록 감추고, 그들의 과거는 왜 또 소설 속의 이야기(평론가들은 액자기법이라는 말도 쓰겠다)에 파묻혀서 명확한 그림이 안 나오게 만들고, 엔딩을 보면 어쩌라는 소리인지 끝까지 어리둥절하게 만들 이유는 대체 무어냐. H/W가 아무리 훌륭하도 S/W가 부족하면 안 팔리는 법. 그야 온갖 감각을 자극하고 글자만 읽을 수 있으면 팍팍 줄거리가 와닿는 시드니 셀던 류의 소설에 중독되어 있다는 점은 내 인정하지만, 감각이 아니라 논리가 애매하면 못 참는 것도 문제냐구요. 노벨 문학상을 타는 사람들은 모호한 게 장점인가. 아니면 그 나이대 작가들은 다 그런 식인가.(생각해보니 생존자도, 하울도, 어둠속의..의 작가도 다 비스무레한 나이에 비스무레한 류가 아닌가)

 결국, 잘 읽고 나서 분통을 터트렸다. 읽는 내내 끌려서 읽은 후에 다 읽고 화가 나면, 정말 하소연할 곳도 없다. 흥미진진한 스토리에 빠져 애매한 서사를 참을 수 있다면 추천. (나처럼) 명확한 설명을 요구하는 사람이라면 손대지 않을 것을 권함.

by 리스 | 2008/07/05 00:30 | Review-도서 | 트랙백 | 덧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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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쿼런틴 at 2008/07/05 01:35
이 책 구할수만 있어도..ㅜㅜ
그리폰 북스 절판된게 너무 많아서 SF를 늦게 접한 이들은 GG쳐야죠.
Commented by 리스 at 2008/07/06 00:36
요즘은 웬만큼 수요만 있으면 재판도 많이 찍어주는데... SF는 여전히 사정이 어려운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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